6월 초순이라 날은 더울대로 더워져가던 어느 날
와이프와 저녁을 먹고 동네를 산책했다.
슬슬 더워지는 기온 때문에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
선풍기가 나왔다.
"우리도 선풍기를 사야 하지 않을까?
이번 여름 무척 덥다던대?"
"그러게 어떤 선풍기가 좋을까?
좋은 건 비쌀텐데 어떡하지?"
"그래도 필요하면 사야지
언제까지 전기세 걱정하며 에어컨 틀 순 없잖아"
"그렇긴 하지"
이런 두서없는 얘기를 이어가며 걷던 중,
어느 빨간 벽돌집 정문, 그러니까 쓰레기 버리는 곳에
낡은 군청색 선풍기와 연두색 선풍기가 있었다.
아마 새 선풍기와 바톤터치하고 버려진 선풍기 같았다.
"이거 버린거겠지?" 와이프가 물었다.
"나 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는데?! 잘 돌아가긴 할까?,
일단 가져가볼까?"
그 말을 끝으로 나는 선풍기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.
집 도착해 선풍기를 걸레로 닦고
작동하는지 보기 위해 군청색 선풍기의 1단을 눌렀다.
선풍기는 잉~~~소리를 내며 열심히 날개를 돌리려
애썼지만
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.
2단을 넣으니 돌긴 도는데 천천히...
3단을 넣으니 휭휭 잘 돌아갔다.
그래도 새거에 비해선 정말 천천히 돌았다.
구글에 찾아보니 콘덴서가 오래 되면 그렇다고 하여
한일선풍기에 전화했다.
"안녕하세요 87년형 모델 콘덴서 찾고 있는데요"
"너무 오래 돼서 그 콘덴서는 없어요."
어쩔 수 없이 같이 주워 온
다른 선풍기의 콘덴서를 떼가다 붙였다.
혹시나 되면 1대는 살릴 수 있을 거 같아서...
기대하는 마음으로 1단을 넣으니 살살살 돌아갔다.
그래도 아예 안 돌아갔던 전 보단 나았다.
이걸 쓸 수나 있을까 하며 혀를 찼는데
예상치 못한 곳에서 탁월한 능력으로 인정받았다.
바로 잠잘 때.
잠잘 때는 체온이 올라가 기존 선풍기 1단은
너무 춥게 느껴졌다.
아침이면 얼린 고기 해동하는 것 마냥
몸이 으슬으슬 했다.
헌데 이 오래된 선풍기 1단은
아주 천천히 돌았기 때문에
옆에서 부채를 부쳐주는 느낌으로
매우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.
알고보니 이런 선풍기를 '아기선풍기' 라고 부르며
기존 선풍기의 3배의 가격을 받고 있었다.
얼핏 겉 모습만 보면
오래된, 제 역할 못하는 선풍기지만
필요에 따라 프레임이 바뀌면
같은 기능을 가졌어도
프리미엄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이
너무 놀랍다.
'고장난' 선풍기라 다행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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